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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미해군 최연소 수병 캘빈 그라함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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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7일 새벽 일본 제국 해군의 기습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여러 척의 함선들이 격침당하거나 손상을 입었고, 2,400명의 수병이 전사했으며, 1,20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의 만행에 전 미국이 분노했다.


수많은 청년들이 자원입대를 신청했고,

여성들도 동참했다.

인종 차별 받고 있던 흑인들도 조국을 위하여 입대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12살의 어린 영웅 캘빈 그라함도 있었다.

 

1930년 4월 3일 미국 텍사스 주 캔튼에서 태어난 캘빈 그라함은 또래 아이들 중 유별나게 활동적이고, 용감한 아이였다.

11살이었던 1941년 12월 7일, 일본 해군의 진주만 기습공격을 지켜본 캘빈은 분노에 가득찼다. 그리고 자신의 사촌이 태평양 전선에서 전사했다는 편지가 도착하자, 자기도 전선에 나가서 싸워야 겠다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당시 군에 입대하려면 최저 나이는 17세였고, 부모의 동의가 있어야만 16세에 입대가 가능했다.

 

1942년 8월 캘빈은 형의 옷을 몰래 입고, 해군 모병사무실로 향했다. 또래 아이들 보다는 발육이 빨랐지만, 17세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입대 당시 캘빈의 키는 162cm, 몸무게는 56Kg이었다.

 

그를 검진했던 군의관은 그가 15세 정도라고 생각했고,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캘빈은 "일본놈들은 우리를 죽일때 키나 몸무게를 상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여 결국 입대하게 된다.

 

1942년 8월 15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의 미해군 신병교육대에 입소한 캘빈은 6주간의 훈련을 받고 하와이 진주만으로 배치된다.

 

1942년 10월 하와이 진주만에 도착한 캘빈은 신형 전함에 탑승하게 된다.

1941년 6월 7에 진수된 최신형 전함 USS 사우스 다코타였다.

캘빈의 보직은 전함에 달려있는 40mm 보포스 기관포 장전수였다. 사우스 다코타에는 68문의 보포스 기관포가 달려있었다.

 

USS 사우스 다코타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던 과달카날로 향했다.


1942년 10월 25일 산타크루즈 해전이 발발했다. 일본 제국 해군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정예 조종사들이 투입된 격렬한 전투였다.

 

미함대는 원형진으로 대열을 짠뒤, 40mm 보포스 기관포의 첫실전에 들어갔다.

 

27일까지 이어진 격렬한 전투끝에 미해군은 USS 호넷을 잃었고, USS 엔터프라이즈가 손상을 입었다.

 

구축함 USS 포터가 격침되었고, USS 머스틴과 앤더슨이 심한 손상을 입었다.

 

81대의 함재기가 격추당했고, 200명이 전사했다.

표면적으로 일본의 승리였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전략적인 패배였다. 산타쿠르즈 해전에서 정예 조종사 148명이 전사해버렸고, 이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1항전과 2항전의 대패 이후 최대의 조종사 손실이었다.

 

USS 사우스 다코타는 산타쿠르즈 해전에서 26기의 적기를 격추했다.

이공로로  캘빈 그라함을 포함한 선원 모두 미해군 부대표창을 받게된다.

그리고 1942년 11월 14일 과달카날 근해에서 일본 해군과 미 해군은 2차 과달카날 해전을 벌이게 된다.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인 23시 50분 정비불량으로 인한 전기장치 고장으로 USS 사우스 다코타는 작동불능에 빠진다.

그로 인해 일본 해군 고속전함 키리시마

구축함 우라나미, 시키나미, 아야나미등에게 포탄 세례를 받게 된다. 총 26발의 포탄이 USS 사우스 다코타에 직격되었다.

 

39명의 수병이 전사하고 59명의 수병이 부상을 입었다.

그중에는 캘빈 그라함도 있었다. 적의 포격으로 파편상을 입은 캘빈의 얼굴은 피로 범벅이 되었고, 이빨도 몇개 날아갔다. 하지만 캘빈은 굳은 정신력으로 통신 장치가 망가진 함내 메신저로 임무를 수행하였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동료들을 의무실로 옮겼다.

이러한 공로로 부상병에게 주어지는 퍼플 하트(전상장)과

동성 무공 훈장을 수여받는다.

 

 


한편 미해군 전함 USS 워싱턴은 8Km떨어진 곳에서 레이더로 이미 전함 키리시마를 조준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신이 서지않아 쏘지 못하고 있었는데 15일 00시 10분 키리시마가 USS 사우스 다코타를 향해 대형 전조등으로 쏘기시작하자 워싱턴의 포탄이 발사되었다.

 

75발의 16인치 포탄 중 9발이 직격했고, 키리시마는 격침된다. 압도적인 전함의 화력에 일본 해군은 도망가고, 제2차 과달카날 해전은 미해군의 승리로 끝난다.

 

1942년 12월 18일 과달카날 해전에서 손상을 입은 USS 사우스 다코타는 수리를 위해 미국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곳에서 너무 어린 영웅의 신화도 끝나게 된다.

 


캘빈은 미국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연락을 하게 되면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게된다. 캘빈은 해군의 허가 없이 텍사스 주로가 장례식에 참여했고, 3개월이나 무단으로 이탈했다.

 

1943년 4월 1일 그가 뉴욕으로 돌아왔을때, 해군은 그의 추방을 결정했다. 그가 얻은 훈장과 복무기록은 부정되었고, 캘빈은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간다. 덤으로 그는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을 가지게 된다.

 

1948년 그가 17살이 되던해에 그는 미해병대에 지원하여 3년간을 복무했다.

 

1951년 얻은 등 부상으로 해병대에서 제대하면서 그는 자신의 태평양 전쟁 복무기록과 훈장을 돌려받기 원했지만, 불가능했고 기나긴 국방부와의 기나긴 싸움을 하게된다.

 

1978년 그는 자신의 사정을 대통령 지미 카터와 의회에 보냈고, 감명받은 지미 카터는 훈장과 복무기록을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1988년 미국 대통령 도널드 레이건은 그의 복무에 따른 보상으로 의료보험 혜택과 연금을 돌려주었고,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까지 얻게 된다.

숙원을 이룬 캘빈 그라함은 자신의 이야기를 책과 영상으로 내었고, CBS에서 드라마화 하였다. 제목은 너무 어린 영웅

그리고 1994년 11월 6일 텍사스 주 알링턴에서 그는 향년 62세의 나이로 잠들게 된다. 그리고 2년후 포트 워스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어린 나이에도 조국을 위하여 달려간 그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전해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