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겨울 창덕궁에서는 12살짜리 소년이 왕위에 올라. 우리가 아는 고종이지.
고종은 어릴적에는 개똥이, 이명복, 이재황이라 불렸지만 왕의 이름을 외자로 짓는 관례에 따라 이희로 개명해.
고종 이희를 중심으로 그의 가계와 가족들을 살펴보도록 할게.
고종은 왕이 될수 있는 핏줄이 아니였어. 인조의 차남 효종의 직계손들이 쭈욱 왕위에 올랐지만 제 24대 국왕 헌종이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절손되었고 방계에서 찾은 것이 강화도령 철종이야. 철종도 딸만 있었을 뿐 아들이 없어서 또 절손이 되버려. 결국 흥선대원군의 로비에 힘입어 헌종의 어머니 조대비의 명에 의해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지.
고종은 촌수상 전대의 왕과 거의 남이라 할 정도로 멀었지만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가게 된것이 신의 한수가 되어 대원군은 철종과 6촌이 되는 왕족지위를 유지할수 있었어. 또 고종을 익종(문조)의 양자로 들여 정통성을 확보하지. 꼼수긴 하지만 당시 양자를 주는 것은 흔한 일이였어. 어쨌든 고종은 그리하여 헌종의 동생이 되는 셈이야.
고종에게는 형 이재면이 있었지만 그가 왕이 될수 있었던 이유는 보통 장남은 집안을 지켜야 하기에 차남인 고종이 양자로 간것이기도 하고 당시 19세로 곧 성인이 될 이재면 보다는 어린 고종이 왕이 되야 대원군 자신이 쉽게 섭정을 펼칠수 있다는 정치적 고려가 크게 작용했을 거야.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 ~ 1898)이야. 그는 부인 민씨에게서 장남 흥친왕 이재면과 고종 이명복, 그리고 딸2명 이렇게 2남 2녀를 보았으며 소실 계성월에게서는 서자 완은군 이재선과 딸 하나 이렇게 1남 1녀를 보았어. 이외에도 몇명의 소실이 더 있었고 젊은시절에 춘홍이라는 기녀가 있는 기생집에 자주 드나들었어.
고종의 형 흥친왕 이재면(1845 ~ 1912)이야. 대원군으로부터 운현궁을 물려받은 당주라고 할수 있어.
이재면의 아들, 즉 고종의 조카 영선군 이준용(1870 ~ 1917)이야. 성격이 호방하고 활달하여 할아버지 대원군의 기대를 받았고 고종에게는 왕위에 위협을 준 일물이야. 그래서 정치적 탄압도 많이 받고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어. 아들이 없어서 고종의 둘째아들 의친왕의 둘째아들인 이우가 양자로 갔어. 이우는 일본군 장교로 히로시마 원폭 때 사망하였고 이우의 아들이 운현궁을 계승했어. 이승만 시대에 황실 재산은 국가에 몰수되었지만 운현궁은 가문의 재산이라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계승할 수 있었지. 나중에 국가에 기부하였어.
또 고종에게는 이복형인 완은군 이재선(? ~ 1881)이 있었어. 역모와 연관되어 사사되었지.
고종(1852 ~ 1919, 재위 1863 ~ 1907)이야. 맨 왼쪽은 33살때의 사진이고 맨 오른쪽은 68살때의 사진이지. 늙어가는 순서대로임.
고종의 여자들을 살펴보자~
"내가 조선의 국모다" 라는 드라마 대사로 유명한 명성황후(1851 ~ 1895)야. 사진을 찍기 좋아했다고 하지만 이 사람이 명성황후다 할 수 있는 확실한 사진은 없고 위의 사진은 명성황후로 거론되는 사진들이야. 본명은 '민자영'. 대원군이 친히 골랐지만 나중에 며느리에게 통수당하지. 1866년 16살의 나이로 고종에게 시집갔어. 고종보다 한살 연상녀임.
명성황후가 궁궐에 들어오기 전에 고종은 궁녀 이순아를 사랑했는데 1843년생으로 고종보다 9살 연상이었어. 1868년 궁녀 이씨는 고종의 장남을 낳았어.
궁녀 이씨는 영보당귀인 이씨가 되었고 그의 아들은 완화군 이선으로 후에 완친왕으로 추존되지만 1880년에 죽었어. 영보당 이씨는 그 이전에 옹주도 낳았으나 1년만에 죽어버려 슬하에 장성한 자식을 남기지 못했고 이후 실어증에 걸려 평생을 외롭게 살다 죽었다고 해.
왕자 생산에 올인해야 하는 궁중 여인으로서 명성황후는 속이 끓었을 것인데 1871년 원자를 생산하지만 항문이 없이 태어났고 태어난지 5일만에 죽어. 다들 아는 대원군과의 산삼사건 때문에 사이가 나빠졌지. 1873년에 공주를 낳았지만 일찍 죽고 1874년 드디어 왕자를 생산하니 이 아이가 '이척', 즉 순종이야. 그 이후 왕자 둘을 생산하지만 얼마가지 못해 죽어. 위의 사진은 순종이 11살때의 모습이야.
명성황후 사후 궁중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했던 여인은 순헌황귀비 엄씨(1854 ~ 1911)야. 영친왕의 어머니지. 위의 왼쪽 사진에서 제일 왼쪽에 있는 사람이
엄씨고 그 오른쪽 젊은 여인은 의친왕의 비야. 엄씨는 궁중의 시위상궁이였는데 고종에게 승은을 입은 후 명성황후에 의해 궁밖으로 쫓겨나. 을미사변 이후 다시 고종의 부름을 받고 아관파천 때 고종의 경복궁 탈출에 기지를 발휘하여 궁중 제 1여인으로 급부상해.
1897년 영친왕 이은을 낳고 귀인으로 봉작되었는데 당시 44세의 노산이였어. 얼굴은 보다시피 이쁘지 않았음. 고종이 엄마같은 스타일을 좋아했나봄. 승은을 입었을 때가 32살 이였는데 승은을 입으면 치마를 뒤집어 쓰고 나오는게 궁중의 법도였다고 해. 얼굴로 보나 나이로 보나 기대주가 아니였던 그녀가 치마를 뒤집어 쓰고 나오자 궁인들이 까암딱 놀랐다고 함.
1877년에 이미 궁녀 장씨가 고종의 승은을 입고 의친왕 이강을 낳았는데 의친왕이 영친왕보다 20살 위였음에도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한것은 엄귀비가 궁중의 막후 실세였고 일본 측 입장에서도 어려서 교육하기 쉬운 의도도 있어서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이 돼. 나중에 영친왕은 1907년 볼모로 유학을 가. 이후 엄귀비는 영상으로나마 아들을 보게되었는데 군사훈련을 받으며 땅바닥에 앉아 주먹밥을 먹는 아들을 보며 통곡했다고 해. 이후 얼마 되지 않아 1911년 급성 바이러스 장염으로 사망하였고 아들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어.
고종의 비빈들과 자녀들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아.
고종은 정식적으로 13명의 부인을 두고 있었지만 왕이니까 비공식적인 것을 합치면 더 많았을 거야. 앞서 언급한 명성황후(순종 母), 귀인 이씨(완친왕 母), 엄귀비(의친왕 母) 외에도 고종은 다른 부인들에게서 여러 자식들을 두었지만 장성한 자식들은 순종, 의친왕, 영친왕, 덕혜옹주 뿐이었어. 나중에 언급할 비공식 딸 1명도 포함.
고종의 부인들 중에 가장 최근까지 생존하고 있던 사람은 광화당 이씨와 삼축당 김씨야. 두 사람은 각각 1967년과 1970년에 돌아가셨는데 위의 신문기사는 당시의 부고 기사지.
사진의 집은 두 사람이 말년에 같이 살았던 집인데 경복궁 동십자각 동쪽에 골목으로 들어가면 있어.
광화당 귀인 이씨는 유복한 중인 집안 출신으로 13세의 나이에 경복궁 지밀 세수간 나인으로 입궁하였고 승은을 입고 1914년 왕자 이육을 낳은 후 광화당이란 당호를 받았어. 위의 아이 사진이 이육인데 1년만에 죽어. 삼축당 상궁 김씨는 1898년 9세의 어린 나이에 경복궁에 입궐하여 나인이 되었고 22세에 후궁이 되었는데 고종은 그녀를 옥토끼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해. 아이는 낳지 못했어. 사이좋게 지내던 광화당 이씨를 보내고 자신도 빨리 따라가 고종을 모셔야겠다고 자주 말했는데 3년후 세상을 떠.
기구한 사연을 갖고 있는 여인으로는 정화당 상궁 김씨가 있어. MBC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룬적이 있음. 이 여인은 명성황후가 살해되고 일본이 경복궁을 장악하게 되면서 친일파에 의해 새 황후로 간택된 여인이야. 고종은 결혼식 준비의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경복궁 탈출을 계획하니 이게 춘생문 사건이고 실패해.
결국 김씨는 이 사건의 여파로 궁밖으로 쫓겨나지.
대한제국이 망한 후 친일파들은 고종황제의 방일을 추진하게 되는데 고종이 끝까지 거부하니까 압박카드로 쓰기 위해 1917년 김씨를 덕수궁으로 불러들여. 고종은 끝까지 방일 안하겠다고 버티고 고종 대신 순종이 방일하지. 고종이 정화당 김씨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김씨는 덕수궁 한쪽방에서 외로이 지냈고 고종 사후에야 시신이나마 볼수 있었어. 그녀는 시신 앞에서 세상이 떠나갈 듯 통곡했다고 해. 그녀는 죽어서 서삼릉의 후궁 묘역에 고종의 다른 여인들과 함께 묻혀.
고종의 유일한 고명딸은 잘 알려진 덕혜옹주야. 최근 덕혜옹주란 영화도 나왔었지. 고종이 1912년 60이 넘어 복녕당귀인 양씨에게서 본 늦둥이 딸이야. 그래서 고종이 딸바보였다고 해. 황적에 편입시키려 했으나 일본이 반대해서 백일 잔칫날 명사들이 초청된 자리에 자신의 딸임을 공개적으로 공표하는 고집을 피워 황적에 편입 시켜.
그러나 황족은 일본의 집중관리에 들어가기 때문에 결국 1925년 어린나이에 일본 유학을 가. 복녕당 양씨는 1929년 유방암으로 사망했고 덕혜옹주도 영친왕이 그랬듯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 이후 덕혜옹주는 정신병이 서서히 오게되지.
고종의 유일한 고명딸은 잘 알려진 덕혜옹주야. 최근 덕혜옹주란 영화도 나왔었지. 고종이 1912년 60이 넘어 복녕당귀인 양씨에게서 본 늦둥이 딸이야. 그래서 고종이 딸바보였다고 해. 황적에 편입시키려 했으나 일본이 반대해서 백일 잔칫날 명사들이 초청된 자리에 자신의 딸임을 공개적으로 공표하는 고집을 피워 황적에 편입 시켜.
그러나 황족은 일본의 집중관리에 들어가기 때문에 결국 1925년 어린나이에 일본 유학을 가. 복녕당 양씨는 1929년 유방암으로 사망했고 덕혜옹주도 영친왕이 그랬듯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 이후 덕혜옹주는 정신병이 서서히 오게되지.
고종에게는 비공식이긴 하지만 덕혜옹주 외에 딸이 하나 더 있었어(사실 딸이냐 딸이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많음). 상궁 염씨가 낳은 딸로 이름은 이문용이야. 염씨는 출산 후 얼마 되지 않아 사약을 받고 죽었다고 해. 그래서 생모의 동료인 임상궁과 고종의 인척들의 도움으로 한 평민 집안에 입양이 돼. 하지만 양부가 죽고 양모가 집을 나가면서 고아가 되고 임상궁과 함께 살게 되지. 이 때 자신의 출생을 알게 되고 이후 결혼도 하지만 남편과 자식을 잃고 다시 혼자가 되버려. 원조가카 정권 시대에 주변의 증언으로 고종의 자식으로 인정되어 옹주의 칭호를 받았고 전주의 경기전에서 살다가 1987년에 사망해. 위 왼쪽 사진은 1980년의 모습인데 가운데 인물은 우리가 아는 그 사람이 맞아. 김재규가 일으킨 그사건 1년뒤의 모습이네. 당시에 비슷한 처지였을거야.
고종의 가족사진이야.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특히 영친왕의 모습은 오려붙인 것처럼 보여. 어쨌건 고종은 여러 부인들에게서 공식적으로 3남1녀를 두었어.
하지만 왕조가 몰락하면서 이들의 운명은 마냥 순탄치는 못했어(다른 몰락 왕조의 왕족에 비해 편했다고 볼수 있지만). 순종은 마지막 황제로 자리만 지키다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어. 영친왕은 이방자 여사와 정략결혼하여 외아들 이구를 낳았지만 이구는 미국인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정착하지 못 하는 삶을 살다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숨진채로 발견이 돼. 지금의 대한제국 황실의 후예들은 의친왕의 자손들로 의친왕은 여러 부인들에게서 많은 자식을 남겼어. 이들의 삶도 왕조의 운명처럼 대부분은 평안하지 못 했어.
순종, 의친왕, 영친왕 (왼쪽부터)
영친왕 아들 이구. (MIT 출신으로 당시 미국인 아내 줄리아와)
의친왕 아들 이건. 일본 육군장교로 복무하였고 '모모야마 겐이치'로 창씨개명해서 완전히 일본인으로 동화.
의친왕 아들 이우. 앞에서 말한것처럼 일본 육군장교로 복무하였고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
의친왕 아들 이석. (간혹 tv출연도 하심)
이외 의친왕 아들, 딸 이해경, 이해원씨 등 여러명 있음.
이상으로 고종의 가계와 가족들 (대한제국의 황실)에대해 알아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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